제목 | 천천히 느긋하게 자기에게 이르는 길 278차 남미 45일(2023.10.3.~1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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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나종운 | 작성일 | 2023-11-27 |
언젠가 가봐야지 했는데 남미를 갑자기 가게 될지 몰랐다. 간절하게 바라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아직은 직장을 다녀야 하고 45일씩 휴가를 낸다는 것은 더더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스페인이나 열흘 다녀와야지 했는데 세계 여행을 떠났던 지인이 코로나로 첫 여행지 아프리카에서 되돌아왔고 못 다한 꿈을 <오지투어>를 통해 내년 1월에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게 45일 여행 프로그램이었고 사이트를 방문해보니 딱 내 스타일이다. 이젠 혼자 정보 찾고 여행하기에는 열정도 없고 더 이상 씹을 고독도 없다. 함께 수다를 떨 여행 동지들이 필요하다. 다행히 사무실에서 2개월 휴가를 얻을 수 있었고 운수 좋은 날들의 끝이, 2023년 10월 3일 인천공항에서 여행 동료 20인과의 조우이다. 내 인생의 가장 높은 봉우리, 비니쿤카 5,036m 10여 년 전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고산증으로 하루 동안 업혀 내려와 포카라 대학병원에 3일 입원하면서 깨박살나고 땅속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겸손하고도 조신하게, 리마에서 술도 안 마시고(피스코 샤워 딱 한 잔-아, 정말 맛있다!) 지내다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3,400m)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숨 쉬는 것도 천천히, 걸음마도 천천히, 다짐을 하며 다녔고 점심식사만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어지러움, 극심한 두통과 함께 근육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다. 고산증이 급, 강타했다. 왜 이러지? 나만 여행에서 탈락하는 건가? 여행을 마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다행히 호텔매니저와 팀장이 산소포화도를 재니 66~73정도였고 응급상황의 대비로 비치하던 산소호흡기로 10여분 도움을 받는 사이 복용한 고산증약과 진통제로 안정이 되었다. 혼자만 쿠스코 야간 탐방을 나가지 못하고 쉬었다. 다음날부터는 아침저녁으로 고산약을 복용하니 계속되는 고산지역이지만 견딜만하다. 날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형형색색 원색이 이곳에 이렇게 잘 어울리나 싶고 나의 두 눈은 새로운 세계를 탐닉하느라 바쁘다. 수많은 사진으로 봐서 오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 것만 같았던 잉카제국 공중도시 마추픽추가 운무에 휩싸여 보지 못할까봐 애가 탔는데 두어 시간 기다린 끝에 한 순간 '짠'하고 나타났을 때는 탄성을 지르고, 해발 3000m 살네라스의 소금 염전은 눈이 부시다. 내겐 그래도 비니쿤카가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고산증을 극복하고 내 인생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왔다는 만족감? 비록 버스를 타고, 말을 탔고 마지막 20여분을 걸어 올라왔을 뿐인 봉우리지만 정말 사랑스럽단 말야. 고산증세로 영혼이 빠져 나간 것 같은 얼굴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좀비 같다. 사진 찍을 때만 마치 정복자처럼 환하게 웃고 만세를 부르지만 두세 발자국만 걸어도 금방 헐떡거린다. 무지개산을 배경으로 완벽한 한 장의 사진 촬영을 위해 긴 줄을 선다. 그런데 거기가 정상이 아니고 30m쯤 더 올라가야 한단다. 아, 이 절망감. 아래서 줄서 기다리느라 진을 빼선지 정작 5,036m 정상 피켓이 있는 곳에 사진 찍는 줄을 서기가 싫어 살짝 옆으로 만세를 부른다. 여기에 내가 왔노라고! 이제는 고산증이 두렵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처방약을 먹으면 되는 거였어! 그래도 머리가 아프면 진통제를 먹으면 되는 거였어. 이후 우유니 사막 투어가 끝날 때까지 무사히 마치고 하산하였고 이제 트라우마는 없다. 최고의 감동, 엘찰텐 피츠로이(3,375m) 비박을 다니겠다고 빨간 텐트를 샀는데 엘찰텐이라고 써 있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발음마저 입에 붙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해보니 남미 파타고니아지역 어딘가에 있는 피츠로이라는 산을 등반하기 위한 베이스캠프 마을이었다. 그게 작년이었고 나를 여기로 데려오기 위한 신의 계시였던 게 아닐까? 약 9천 년 전에 파타고니아 원주민들이 동굴에 손바닥 그림을 찍어놓아 유명해진 <손의 동굴>이 있는 페리노 모레노에서 장거리 야간 버스로 밤새 11시간을 달려와 이른 새벽 엘찰텐에 도착했다. 아침 식사 후 전망대 코스에 올랐다가 오후에 세레토레 산군으로 출발, 산길은 아기자기 하기도 하고, 습지가 나타나는가 하면 오래 전에 불탄 듯 한 고사목이 잔뜩 널브려져 있는 곳은 스산하다. 빠르게 산길을 오르다보니 뒤에 일행들은 내일 일출과 라구나 로스 트레스 호수 트레킹을 위해 하산을 했다. 팀장 이하 남은 3인의 발길은 더욱 빨라진다. 내가 고산지역에서 취약하지 고도가 낮은 이곳에서 날아갈 수 있어! 또 도진다. 자만! 툼바도 전망대에 오니 눈이 조금 있었는데 마치 넓은 눈밭인 것처럼 극적인 전시효과를 누리기 위해 트리밍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웬걸 조금 더 가니 그냥 눈이 덮인 산길을 한참 올라야했다. 광활한 자연 속으로 점이 되어 사라지는 사람들. 사진을 찍어 놓고 보니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숨이 멎을 것만 같다. 6초짜리 동영상을 보니 압도적이게 웅장한 게임 속 배경에 영원히 갇혀 있는 3인 중에 내가 있다. 거의 저녁 8시쯤 하산을 하였는데 해가 지지 않고 훤하다. 고위도, 저위도 뭐 이런, 극지와 가까워서 그런 건가? 우리 팀원 중에 지구과학, 지리선생님이 계셨는데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님 우리나라 여름철에 해가 긴 이유와 비슷한 걸까? 다음날 일명 불타는 고구마라는 피츠로이 일출 풍광은 보지 못했지만 <라구나 데 로수 트레스 호수> 트레킹도 아주 마음에 든다. 거대한 자연의 풍경은 저 멀리 앞에 가는 인간을 개미 크기 정도로 왜소하게 만들어주곤 한다. 눈이 펑펑 쏟아져 크리스마스 기분이 난다. 내가 늦잠을 잤던 삼 일째 날에 피츠로이의 불타는 일출이 장관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남의 떡은 항상 크다. 코파카바나 해변의 달리기와 난리 블루스 내게 세 번째로 기억에 남는 추억을 꼽으라면 마지막 날 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이다. 도대체 해변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 거야. 자그마치 5km란다. 파도가 높고 빠른 속도로 말리듯 쓸려 내려가는 속도가 무서워 물속에는 못 들어갔다. 대신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상의 수영복에 반바지를 입고 기나긴 해변을 마구 달렸다. 한밤중에 해변을 달리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다. 룸메이트는 노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섹시댄스를 하고, 난 또 빌려 입고 미스코리아 진의 행진으로 난리 블루스다. 현실 세계의 날카로운 타인의 눈들과 자기 검열로 정말 작디작은 소망이지만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해내고 즐거워하던 해변의 밤이다. 비키니를 입은 브라질 여중고생쯤 되는 아이들이 다가와서 소지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며 말을 붙인다. 한참을 함께 얘기하고 사진을 찍고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나서니 자신들의 아빠라고 소개를 해주어 잘 생겼다고 하니 모두들 깔깔대고 웃는다. 그렇게 45일의 여정이 막을 내린다. 팀장이 그랬다. 귀국까지 마쳐야 끝난다며 ‘끝나는 게 끝난 게 아니다’는 명언을 아로새길걸 그랬어. (이게 궁금하다면 영원히 없을 다음 편을 기다리세요!)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5개국의 끝없이 삭막하고 광활한 사막 속에 다채로운 풍광들, 청록의 호수, 대자연 앞에 겸허해지는 순간들, 나도 가봤다고 자랑하고픈 마추픽추, 우유니사막,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덤이었던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 로뎅의 조각 입맞춤, 목이 긴 모딜리아니의 여인들의 명작들, 육감적인 탱고, 우수아이아 세상의 끝인 등대로 가는 뱃길에 해피투게더의 장국영을 기리며 마신 샴페인, 새콤달콤 쎄비체,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또 먹고픈 아사도, 달콤한 피스코 샤워, 코로나 맥주를 거꾸로 꽂아준 대용량 마가리따 칵테일, 페리토 모레노에서 관광을 나가지 않고 림과 낮부터 한가롭게 와인을 마시며 노닥거렸던 시간들, 저마다 여행의 추억들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도 다가오는 감동은 다를 것이며, 마음에 새겨지는 깊이도 다를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다. 45일의 남미여행이 빠르게, 때론 이른 새벽부터 정신없이 이어졌지만 이렇게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천천히 느긋하게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 남아있지 않나 싶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