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278차 45일간의 남미 여행 후기 ('23년 10. 3 ~ 11. 16) 벅찬 선물 같았던 남미 여행
작성자 송정희 작성일 2023-11-30
45일의 긴 여정이 한바탕 봄꿈처럼 아련하다.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진 선물 보따리 같기도 하고.
그 안에 담긴 선물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기억도 못할 정도로 크고 벅찬.
살면서 그런 감격스러운 순간은 흔치 않을 테다.
하여, 여전히 꿈길을 더듬는 듯 몽롱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여러 풍경들이 뒤죽박죽 얽혀 불쑥불쑥 떠오른다.
떠날 때는 마추픽추와 티티카카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컸다. 지금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단연, 이과수다. 거대한 황토빛 물줄기가 굵고 흰 포말을 피워 올리며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던. 흰색과 황토색의 구슬 알갱이들을 트럭째 쏟아붓는 듯한 물줄기. 왼종일 폭포멍을 해도 부족할 듯, 바라보고 있을수록 더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지던. 이후의 일정들이 모두 심드렁하게 여겨질 정도로 압도적인 매력으로 말을 잊게 만들던.

오랜 벗의 정겨운 눈웃음, 양지바른 고향의 얕은 언덕처럼 푸근하게 안겨 오던 쿠스코 야경. 반짝반짝 빛나며 고요히 흐르던 푸른빛의 강, 라파즈 야경. 두 야경도 각별한 아름다움으로 뇌리에 박혔다.
추위에 떨며 두 시간 넘게 안개 속을 더듬으며 기다려 맞이했던 마추픽추 전경. 높고 깊은 밀림 어딘가에 오랜 세월 감추어져 있었다는 잉카 제국의 도시. 보여줄 듯 말 듯 애를 태우던 마추픽추는 처음 그 도시의 이름을 들었을 때 느꼈던 신비스러움과 외경감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고 도시 전경이 활짝 드러나니 오래도록 품어왔던 신비감은 반감되고 조금은 허망하고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해 아래 영원한 것이란 없다’지만 이 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곳에서 울고 웃으며 삶을 영위하던 이들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일까...

잉카 제국을 뒤로 하고 떠나오던 기차 안에서는 언뜻언뜻 얼굴을 내비치던 손바닥만한 설산에도 환호하며 마추픽추를 떠나왔는데, 비니쿤카를 오를 때는 병풍처럼 시원스레 펼쳐진 설산을 말잔등에 올라앉아 흔들흔들, 눈높이에서 원 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 흐뭇함이란!
그와 동시에 내 말을 몰던 늙은 마부의 눈물 젖은 눈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무겁고 불편한 마음도 잊히지 않는다. 긴 장화와 전통 의상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받고자 산길을 달음박질로 내달리던 젊은 마부들과 달리, 그는 하지 정맥류로 인해 나무 옹이처럼 툭툭 튀어나온 종아리, 슬리퍼만 신은 맨발로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몰았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인지... 사람 팔자란 정말이지 우연에 달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자주 잊고 툴툴대지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설원을 질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던 소금사막, 거대하고 황량하고 쓸쓸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으로 끊임없이 눈길을 사로잡았던 알티플라노고원의 다양한 풍광과 차량을 에워싸던 흙먼지들, 붉고 푸른 호수와 홍학들.
싱그러운 초록과 샛노란 민들레가 유독 돋보이던 바릴로체와 엘 찰텐. 눈덮인 오소르노 화산을 배경으로 노랑 차카이꽃 관목이 무더기무더기 흐드러지던 푸에르토 바라스. 낡았지만 그림 같은 집들. 자세히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앙증맞은 봄꽃들. 에메랄드와 코발트빛으로 반짝이던 호수와 호수를 호위하듯 둘러선 설산들. 투명한 블루의 크레바스와 빙하. 비현실적인 느낌의 유빙... 파타고니아는 그런 환상적인 풍경들로 가득했다.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같은 풍경이라도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그 인상은 사뭇 달라진다. 하지만 남미는 풍경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 지구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색깔과 풍광이 모여 있는 곳. 변화무쌍하고 황홀하고 놀라웠다.

격정과 절제의 절묘한 밀당! 사흘 내리 탱고의 춤사위에 취해 보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밤도 있었다. 떠날 땐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배를 두드릴 정도로 고기를 맛있게 먹은 경험도. 고기를 별로 즐기진 않지만,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가끔 그리울 것 같다.

여정이 길어지면서 남미의 풍경처럼 시시각각 다르게 다가오던 일행들의 개성을 발견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저 하나 건사하는 것만 해도 벅찬 일정이건만 살뜰하게 다른 이들까지 챙기던 누구누구며,
찰지고 맛깔나는 입담과 유머로 박장대소를 선물하던 이들이며,
호감에서 실망으로,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의외의 매력과 반전에 놀라기도 했던 누구누구며...

사진으로 되돌아보니 그야말로 천상의 그림 속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머릿속 잔상으로도 그러하다. 기억은 잘도 왜곡되어 ‘그곳에서 본 모든 것이 좋았더라’로, 지극히 만족스러웠던 여행으로 남으려 한다.
실상은 조금 다르다. 분명 툴툴거렸고 불평도 더러 있었던 여행이었다. 7시간에서 10시간까지, 길고도 피곤했던 잦은 이동들. 이른 출발과 늦은 도착. 불규칙한 식사와 잦은 허기. 부실한 조식, 고픈 배를 안고 이삼십여 분의 기다림 끝에서야 먹게 되는 늦은 점심, 8시는 기본이고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떼우기도 했던 저녁. 땡볕 아니면 추위, 그리고 바람, 기다림과 행군의 반복인 여행이기도 했다.
기대했던 저녁 뷔페는 불발되고 대체된 식사는 빈약하고 입에 맞지 않아 누군가에게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던 소금 호텔의 저녁 식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일정은 티티카카 호수다. 누군가는 버킷리스트로, 남미 여행의 백미로 꼽기까지 했던 그 호수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기 일보 직전. 주린 배를 안고 허겁지겁 티티카카를 만났지만, 일몰에 쫓겨 바다인지 호수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다는 티티카카의 진면목을 발견할 기회도, 갈대배를 타는 경험도 놓치고 말았다.
버스에 앉아 달리기만 했던 루타 40도로는 솔직히, 지루했다. 애인의 콧노래도 한두 번이다. 안데스 설산을 마주할지라도 비슷한 풍경을 종일 보아내는 것은 그리 재미진 일은 아니었다. 두 발로 직접 걷는다면 또 모를까.
설상가상, 긴 이동 끝에 만난 페리토 모레노는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키다리 미루나무만 가득한 작은 마을. 긴 이동으로 인해 몸의 순환이 잘되지 않아 급체를 했던 것인지, 저녁 식사 도중에 갑자기 일행 한 분이 쓰러지기도 했다.
(덕분에 혼비백산했지만, 아르헨티나의 응급의료 시스템이 수준 이상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구급차의 출동과 의사의 등장이 어찌나 신속하던지!)
기대했던 마블 채플 투어는 날씨가 허락하지 않았고, 슈퍼에서는 흔한 라면 한 봉지도 구할 수 없었다.
제바요스산 투어와 점심은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이후로 무수히 마주한 비슷한 풍경을 생각하면 생략해도 아쉽지 않은 일정이었지 싶다.
(그나마 손의 동굴 투어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고 거대한 바위와 협곡, 협곡 안쪽의 푸르름과 바깥쪽의 황량함이 대비된 이색적인 풍경도 훌륭했다.)

과유불급.
‘느리게’ 걸으며 남미를 제대로 체험하자는 타이틀과
남미의 볼거리란 볼거리는 빠짐없이 맛이라도 보고 오라는 듯이 짜여진 일정표는 상충했다.
다음엔 비슷한 풍경들은 조금 정리하고 꼭 봐야 할 것들에 집중해서 충분한 시간을 안배했으면 좋겠다.
단체 배낭에서 자유 배낭의 여유까지 얻으려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오지 투어와 함께하는 남미 여행이 더욱 진한 감동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쉬운 것들을 꼽아본다.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여행은 내 인생 최고의 날들 중 하나였다. 벅찬 선물이었다!
불편과 불만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즐거운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행은 내게 그렇다.
여행도 인생도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산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 그런 완벽한 세상은 없다.
남미 여행 도중에 이미 다음 여행지를 더듬고 있는 나와는 달리, 규칙적인 생활과 예측가능함, 질서, 깨끗함, 한국 음식 등등, 여행을 통해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만 줄곧 찾아대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안정감을 찾은 남편을 보면서, 인간이란 정말 다른 존재구나, 새삼 확인한다.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이해는 멀다. 이 투덜리우스 씨는 어째서, 왜,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걸까,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감사합니다!
오지 투어.
외유내강의 여행 고수, 나초님, 아영님.
두 분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이끎과 몸을 사리지 않는 도움, 섬세한 배려는 두고두고 그리울 것 같습니다.
든든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최고의 길라잡이였습니다.
함께 했던 일행들. 우연이 만들어준 행운과 웃음들.
좋은 날씨로 우리의 여정을 도와주신 누군가의 공덕 많으신 조상님까지,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 ()